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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대명산(서울경기)

북한산 백운대 서벽밴드[제1,044회 /2022.10.12(수)-60차산행*山791]

 

코스 : 밤골-파랑새능선-춘향이 바위-마른 폭포-시발 클럽-서벽 밴드-백운동 암문-숨은 벽 정상(엄지 바위)-숨은 벽-전망바위-밤골(2.2km)-밤골 원점(주차무료)

밤골 주차공간이 평일 이른 시간이라 가능 내려와서 보니 우측은 다 막아놨고 좌측으로 한 10대 가능함.

처녀 폭포

총각 폭포

백운대 방향

슬랩 시작

암세포 ㅋㅋ

직벽

코주부(오늘은 혼자로 우회해서 올라간다)

파란색 없는 파랑새

전망바위(마당바위)

파랑새

춘향이 바위

노적봉

마른 폭포가 젖어있다(좌측으로 올라가느라 애먹었네)

올라가니

북한산 여우굴 마른폭포 염초봉 약수암 릿지 아래 장소  택시기사들로 구성된 시발 클럽이라고 있었어 씨발... 이 아니고 시초를 의미하는 시발

시발(始發) 택시, 1955

‘시발’이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생산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8월의 일이다. 전쟁은 미군을 통해 들어온 군용 차량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까지 여러 경로로 이 땅에 들어와 운행되고 있던 많은 자동차들을 파괴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파괴된 자동차들의 부품을 활용하여 운행 가능한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자동차 재생 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시발자동차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1900년대 초 고종황제를 위한 포드 자동차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50여 년 만에 국산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최초의 자동차는 을지로 천막 안에서 최무성, 최혜성, 최순성 3형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시발자동차에는 4기 통 1323cc 엔진이 탑재되었는데, 그 엔진은 일본에서 엔진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영삼이 제작하였다. 그가 없었다면 시발자동차도 없었을 것이다.

1955년 산업박람회 시발택시 제1호

처음 생산되었을 때, 시발자동차는 잘 팔리지 않았다. 그 존재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제품의 질에 대한 확신도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시발자동차의 판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산업박람회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5년 10월 1일부터 12월 21일까지 광복 10주년을 기념해 창경원에서 산업박람회를 개최하였다. 이 박람회에는 시발자동차를 포함하여 총 40,739점의 물품이 출품되었는데, 박람회 폐막식에서 시발자동차는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이 자동차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당시 상공부 장관에게 매주 시발자동차의 제조 및 판매 상황을 보고하도록 지시했을 정도였다. 산업박람회를 계기로 시발자동차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최무성 형제는 이렇게 몰려든 구매 희망자들의 계약금으로 주물공장을 인수하여 양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서 시발 1호를 만들어냈던 조그마한 천막공장은 ‘국제 차량 공업사’라는 이름의 그럴듯한 자동차 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디자인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시발자동차는 군용 지프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상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유선형의 자동차 형상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유선형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철판을 가공하는 기술과 설비들이 필요한데 당시는 그러한 것들을 바랄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시발자동차의 외형은 드럼통을 펴서 수공예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이유로 각진 지프 형상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발 1호의 사진을 보면 곳곳에서 드럼통을 편 흔적들이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자 형상으로 꺾인 라디에이터 그릴, 헤드램프를 따라 자연스럽게 휘어진 본 네트, 그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창, 그리고 창을 따라 휘어진 천정 모서리 부분의 마감 등을 볼 때 형태적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형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시발자동차의 형상은 한국전쟁 당시 이 땅을 누볐던 미군 지프의 형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상은 이후 쌍용자동차의 코란도 시리즈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1955년대 서울역 앞 시발택시의 행렬

1960년대 윤보선 대통령 시발택시 시찰

세리프가 없는 모던한 서체로 이루어진 ‘시-바ㄹ’이라는 로고는 디자인의 맥락에서 특징적인 부분이다. 시발자동차의 이 로고는 1908년 주시경 선생이 처음 주창한 이래 그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던 한글 풀어쓰기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첫출발’을 의미하는 ‘시발’이라는 한자어가 풀어쓰기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한글 단어라기보다는 추상적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시’와 ‘바ㄹ’ 사이의 ‘-’는 그러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도요타나 포드, 시보레와 같은 자동차를 경험한 당시 사람들의 기대 수준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바ㄹ’이라는 로고에는 한글로 이국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모순되는 욕망이 묻어난다.

시발자동차는 소위 ‘백’을 써야만 살 수 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상류층 사회에서는 이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한 ‘시발계’까지 등장하였다. 특히 영업용 택시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시발자동차는 ‘시발택시’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2년 8월 부평에 현재 GM대우의 전신인 ‘새나라 자동차공업 주식회사’에서 닛산의 블루버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한 ‘새나라’ 자동차를 판매하면서 시발자동차의 판매량은 급격히 떨어졌다. 새나라 자동차는 시발자동차와 달리 유선형에 가까운 세련된 외형을 가지고 있었고, 완성도 또한 높았다. 무엇보다 시발 자동차의 판매량 저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961년에 들어선 군사정권이 제정한 ‘자동차공업 육성법’이었다. 이 법에 의해 새나라 자동차는 승승장구하였고 시발자동차는 급속히 거리에서 사라져 갔다. 택시회사들은 빠르게 ‘시발’을 버리고 ‘새나라’로 갈아탔다.

새로운 것은 이전까지 존재하던 것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면서 등장한다. 새나라 택시는 한순간에 시발택시를 낡고 오래된 구식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러한 작용을 통해 스스로의 새로움을 자랑했다. 1963년 말 시발자동차는 생산을 중단했다. 그때까지 시발자동차는 약 3000여 대가 생산되어 전국의 가로를 누볐다. 시발자동차가 등장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 자동차 산업은 경쟁력을 가진 주력 산업으로 부상하였다.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이 자동차의 역사가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상황은 늦게 찾아왔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발(始發) 택시, 1955 (한국의 생활 디자인, 오창섭)

서벽 밴드 시작

와이어 끝

약수암 릿지

밤골로

숨은 벽 정상

호랑이굴

대동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