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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권

검단산[제1,020회 /2022.6.11(토)-36차산행*山781]

검단산

검단산(657m)은 하남시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수도권에 위치한 편리함으로 인해 등산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인 하남 위례성을 지키는 영산이기도 했던 검단산의 ‘검’은 거룩하고 신성한 숭배의 대상을 일컫던 말로 ‘검단’이란 성스러운 제단을 의미합니다. 곳곳에 백제 초·중기의 왕들이 국가의 번영과 태평을 빌던 재단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현재에도 매년 산악인들이 산신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정상 부근은 넓은 공터로 사방이 확 트여 있고 특히 그 위에 펼쳐진 갈대숲의 장관은 가히 일품입니다.

*산곡초교 등산로 산곡초등학교 => 통일기원 돌탑 => 곰터 약수터 => 정상(3.1km, 소요시간 1시간 50분)

*현충탑 등산로 창우동(애니메이션 고등학교) => 현충탑 => 곱돌 약수터 => 정상(4.2km, 소요시간 2시간)

*유길준묘 등산로 창우동 => 유길준묘 => 전망바위 => 정상(3.5km, 소요시간 1시간 50분)

*아랫배 알미 등산로 아랫배 알미 => 감시초소 => 정상(2.9km, 소요시간 1시간 40분)

*윗 배알미 등산로 윗 배알미 => 송전탑 => 삼거리 => 정상(4.7km, 소요시간 2시간 10분)

 

 

현충탑노상주차장(2.000원)-호국사-북봉전망대-정상-유길준묘-주차장

호국사로(첨 가본다)

이 코스는 한적하다

미사리 조정경기장

북봉 전망대

높은 용문산 우측 백운봉

북한산 도봉산 뿌여타 아쉬움

예봉산  강우레이더

유길준묘

유길준과 서유견문록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기행문을 쓰다

 

 1885년, 유럽의 도시들마다 행색이 초라한 조선 청년이 불쑥 나타나서 서툰 영어로 뭔가를 묻기도 하고 메모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그는 빠듯한 여비를 아껴 쓰면서 이곳저곳 기차를 갈아타며 분주하게 쏘다녔다. 그러니 단순한 관광이 아닌 기행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었다.

 

 유길준은 우리나라에서 몇 가지 ‘최초’를 기록한 사람이다. 그는 일어와 영어로 말하고 쓸 줄 아는 1세대였고 한문 지식이 해박했음에도 국한문 혼용의 문체로 저술을 남긴 지식인지만 무엇보다 유럽을 최초로 기행 한 조선 사람이다.

 

 이해 12월 유길준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파들이 속속 잡혀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는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료들이 갑신정변에 연루된 개화파라고 하여 바로 연금을 당했다.

 

 그가 연금당한 장소는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 다음에는 가회동 삼청공원 안에 있었던 취운정(翠雲亭)이었다. 그는 취운정에서 연금당해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속에서, 미국과 유럽에서 적어온 메모지를 펼쳐놓고 견문록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에 적은 메모지가 많이 없어졌고 또 연금생활을 하며 참고할 책을 제대로 구할 수 없었으나 기억을 되살리고 일부의 서적을 참고해 집필을 서둘렀다. 연금생활 속에서 집필을 계속하여 6년 정도 걸려 방대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완성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문물제도를 자신이 보고 겪은 대로 소개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 유럽 기행문으로 꼽힌다. 더욱이 국문과 한문을 섞어 쉽게 썼다는 데에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다

 

 그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진사를 지낸 아버지 유진수(兪鎭壽)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가학을 이어 양반 행세나 할 수 있는 가정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으나 여느 사람이 보면 엉뚱한 길로 빠져들었다. 그의 외가는 세도가의 마을인 한양의 북촌에 있었는데 여기에서 외조부 이경직에게서 한문을 익혔다.

 그의 본가는 경기도 광주의 덕풍리였으나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살아 서울의 양반 자제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개화사상가들

 

                                   격변의 시대에 개화와 수구는 우리 민족을 크게 갈라놓았다.

                                   개화사상의 중심에 서서 사회를 이끌었던 젊은 사상가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

 

 그는 1870년대, 곧 10대 소년 시절부터 당시 개화파의 영수였던 박규수의 안국동 집을 드나들면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윤식 등과 어울려 청나라와 유럽에 대한 지식을 얻어들었다. 그래서 개화파의 한 청년이 됐다.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수표교 옆에 사는 유대치(劉大致)에게 개화사상을 배웠으며 개화사상가요 유명한 시인인 강 위에게서도 지도를 받았다. 특히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양무운동에 관련된 책을 탐독했다.

 

 1881년 조정에서는 일본의 근대식 신무기의 시찰과 학습, 여러 신문물을 배우게 하려고 청년들을 골라 청나라와 일본으로 보냈다. 그 막후에는 개화 승려 이동인과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의 지원이 있었다. 이 시찰단은 12개 조, 6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끼어 일본으로 갔다. 당시 유람단은 여러 조로 나뉘어 역할을 맡았는데, 그와 함께 간 수행원으로는 윤치호, 이상재, 민건호 등이었다. 이들은 유망한 청년들이었다. 다른 벼슬아치와 수행원들은 일본의 문물을 3개월 동안 돌아보고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3개월의 여행을 마치고 계속 남아 일본의 문물을 익히는 유학생이 됐다.

 

 어윤중, 홍영식 등 개화파 지도자들이 그에게 근대 지식과 일본의 여러 신문물을 배워오게 하려는 계획에 따라 그를 남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일본 유학생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유길준은 경응의숙(慶應義塾, 지금의 게이오대학교 전신)에 입학해

 

 1년쯤 공부를 했다(입학이 아니라 사숙을 했다는 주장도 있음). 그는 경응의 숙의 교수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도를 받았고, 후쿠자와가 지은 《서양 사정》을 탐독해 유럽의 정세와 문화를 알게 되었다. 또 후쿠자와는 신문 〈시사 신보〉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신문의 기능을 논함〉이라는 논설을 썼다.

 

 마침 박영효가 수신사로 1882년 일본에 왔다. 그는 박영효의 통역으로 활동하다 박영효가 귀국할 때 따라왔다. 이때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어 개화파들이 조정에 많이 참여해 개혁정치를 단행하고 있었다. 박영효는 한성부윤이 되어 신문국을 설립하고 그에게 일을 맡겼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신문 지식을 바탕으로 신문 발간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자금난을 겪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미국과 통상조약이 맺어져 조정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친선사절인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의 수행원이 된 것이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하고 40여 일 동안 미국을 시찰한 뒤 귀국했다.

그런데 유길준은 다시 미국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것이다. 당시는 미국 주재 공사관이 설치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먼저 영어와 과학을 익히고 나서 대학 예비과정으로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 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나이 20대 중반이었다.

이때 고국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고국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면서 유럽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귀국하려면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하나는 하와이를 거쳐 알래스카 연안을 거슬러 일본 땅에 기착하고서 조선으로 오는 일본의 기선을 이용하는 항로이다. 미국의 증기선은 직항로로 일본으로 올 수 없었다. 게다가 일반 여객이 거의 없어서 정기여객선을 두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서 유럽으로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을 타고 유럽으로 갔다가 중국의 홍콩 또는 상하이로 오는 여객선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미국 생활은 1년 3개월, 유럽여행은 1년쯤 걸렸다. 그는 서울에 돌아오자 바로 연금당했다.

 

 그는 7년의 연금 생활 끝에 풀려났다. 1894년 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난 뒤에 이른바 갑오개혁이 단행되었다. 갑오개혁은 일제가 뒷전에서 개화파를 조종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갑오개혁은 사법권의 독립, 양반의 특권 배제, 노비제도의 철폐, 조세의 금납 따위 근대적 개혁 조치들을 내세웠다. 이에 유길준은 처음에는 일제와 협력하여 개혁의 내용을 만들고 이를 시행하는 여러 조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이해 12월 개화파의 연립정권이 수립되자 처음에는 내 무협판, 뒤에는 내무대신이 되어 종두법과 단발령의 시행 등 개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이런 급진개혁은 보수세력과 민중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고 항거하는 사태로 번졌던 것이다.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일본 세력을 꺾으려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해 갔고 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 탁지부대신 어윤중 등이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맞아 죽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제 친로파(親露派)의 세상이 되었다.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당시 일본에는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한 조선 청년 장교들이 일심회(一心會)를 조직하고 있었다. 유길준은 이들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계획했는데 사전에 탄로가 나서 본국에 들어와 있던 장교들이 체포되었고 그 주모자의 한 사람이 유길준이라는 것도 발각되었다.

 

    저술로 근대화에 기여하다

 

 이리하여 외교 분쟁이 야기되자 일본 정부도 그를 감싸고 돌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경찰에 구금되었고 이어 일본에서도 머나먼 섬인 오가사와라에 유폐되었다. 바로 김옥균이 갇혀 있던 섬이었다. 유배 생활 4년을 포함해 11년에 걸친 망명 생활은 가시밭길이었고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 외딴섬에 살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곧 정치활동보다 사회운동으로 전환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망명 생활을 하며 우리말 문법의 체계를 세운 《대한 문전(大韓文典)》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가 신문을 국한문으로 발행하고 〈독립신문〉의 문체를 익혀두기도 한 문법 지식이 바탕이 되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뒤에 이 책을 발간했다. 이 문법책은 외진 곳에서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고 혼자서 완성했다. 국어문법의 정리에도 선구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이어서 이른바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반식민지의 처지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내정을 간섭했다. 이런 판국에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들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귀국하게 해달라고 교섭했고, 실권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고종은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개화파들이 반식민지 상태의 고국에 돌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유길준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고종은 끝내 일제의 강요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를 계기로 일본 망명객들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나라를 구하려던 정치가들이 나라가 망해가는 판국에 돌아온 아이러니한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유길준은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잃은 분노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만주나 상하이 등지로 망명할 때에, 가장 온건하고 안전한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한국통감부가 ‘정미 7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박탈하자 반대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고종이 이를 알고 유길준을 가상하게 여겼다. 아무튼 그는 국민계몽에 앞장섰다.

 

 백성들이 개화하지 못하고 산업이 일어나지 못하며 교육이 보급되지 못한 데에 나라가 망한 1차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미국에서 생물학을 배우고 난 뒤에 철저한 진화론자가 됐다. 미개 사회는 생물이 진화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믿었다. 한국 사회를 진화시키자. 이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유럽 제국주의 이론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흥사단과 같은 수양 또는 사회단체의 결성에 참여했고, 학교의 설립, 농림 강습소와 노동 야학회의 설치 등 교육 운동에 앞장섰다. 또 민족 자립경제를 위해 국민경제회를 조직하고 철도를 우리 손으로 깔기 위해 호남철도회사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교과서를 스스로 편찬하여 보급했고, 《이태리 독립운동사》 등 유럽의 역사책 또는 멸망사를 써서 구국의 정신적 귀감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계몽운동을 벌일 때 고종이 예전과는 달리 은밀하게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나라가 망할 무렵,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을 것이다. 그는 일진회에서 한일합병을 주장했다는 소문을 듣고 일진회 사무실로 달려가서 간부들을 주먹으로 치는 정열을 보이기도 했다. 또 일제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뒤에 그 공로를 인정하고 특권을 보장해주는 작위를 그에게 주자 이를 거절했다. 그는 그리스 토교 신앙을 지키며 노량진에 은거했다. 그런 끝에 신장병이 도져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자식들을 앉혀 놓고

 “이 아비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묘비를 세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친일파라는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지는 않았다. 더 살았다면 그의 동료 김윤식과 같이 친일파로 변신했을지 모를 일이지만, 유길준은 조국의 근대화를 이룩하려는 뜻이 좌절되자 울분으로 나날을 보내면서 숨어 살았다. 하지만 동료인 김택영, 박은식, 신채호처럼 중국 등지로 망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많은 저술을 남겨 민족정신 또는 근대의식의 형성에 공헌했다.

 

 수많은 개화파들이 뒷날 친일로 전락했음에도 그는 나름대로 지조를 지켰으니 가상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단순한 서구 기행문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의 근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를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각 부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근대화 방략서’이라고 할 수 있다.

 

 1888년 박영효가 지은 「조선국 내정에 관한 건백서」(『일본 외교문서』21권, 292∼311면)에서 국정개혁 구상을 밝히고 있지만 그 분량과 내용의 심도에서 『서유견문』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서유견문』은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근대화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지적 사항

 

 국한문혼용체로 556면. 갑오경장 기간 중인 1895년 일본의 교 순사(交詢社)에서 간행하여 현재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유길준 전서』(일 조각, 1971) 전 5권 중 제1권으로 전해지고 있다.

 

  내용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1882년 여름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일본에 체류하던 중 구상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이 30년 만에 부강을 이룬 원인이 서구의 제도와 법규를 모방한 것이 십중팔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서구의 진상을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조선 정부가 구미 제국과 조약을 맺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 각국 등 바깥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힐 목적으로 책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또한 당시 일본에서 그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지은 『서양 사정』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일본 국민의 개화 계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은 책을 써보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 발발을 계기로 서둘러 귀국, 작업이 일시 중단되었다가 실제 집필은 미국 유학 후 연금 기간 중인 1887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1883년 7월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報聘使)의 정사 민영익(閔泳翊)의 수행원으로 동행해 미국에 유학한 유길준은 1884년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원래 계획했던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1885년 6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하자마자 포도청에 감금되고 두 달 만에 우포 대장 한규설(韓奎卨)의 집에 유폐된다.

 

 이는 갑신정변 후 청국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개화파를 탄압하고 있던 상황에서 그의 재능을 아낀 고종과 한규설 등이 그를 보호 활용하기 위해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1887년 가을, 민영익의 배려로 그의 별장인 취운정(지금의 가회동에 위치)으로 옮긴 유길준은 심적인 안정을 찾고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자 원고를 재정리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틈틈이 써 둔 원고 외에 각종 외국 서적을 번역해 인용 또는 참고하였다.

 

 특히 『서양 사정』과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거나 비슷한 점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이를 가장 많이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포셋(Henry Fawcett)의 『부국 책』과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 등도 인용한 흔적이 보인다.

 

 『서유견문』의 원고는 1889년 늦봄에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연금 상태라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894년 갑오경장 기간 중 일본에 보빙사의 일원으로 가면서 원고를 가져가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 순사에서 발간하였다(1895년 4월 25일).

 

 그는 1000부의 책을 찍어 판매하지 않고 정부 고관을 비롯한 당시의 유력자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던 갑오개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홍보하는데 주력하였다. 전 20편으로 이루어진 『서유견문』은 크게 서론, 본론, 결론, 그리고 보론의 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서론은 제1∼2편으로 세계의 지리를 기술하고 있다. 세계의 산 · 강 · 바다의 높이나 깊이 등을 포함해 지나치게 상세하리만큼 세계의 지리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세계는 넓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라는 웅변으로 읽힌다. 개화 또는 근대화의 출발은 전통의 중국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본론은 제3편 「방국의 권리」부터 14편 「상고의 대도」까지 이다.

 여기에서는 국제관계·정치체제·인민의 권리·법률·교육·상업·조세·화폐·군대·종교·학술 등 각 분야의 근대적 개혁의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결론은 제14편 뒷부분 「개화의 등급」이다. 여기에서는 개화의 개념과 그 방법론을 논하고 있다. 이 글은 당초에는 없었는데, 출판 직전, 갑오경장을 주도하는 시점에서 개혁의 구체적인 방법과 의지를 담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제15편부터 제20편까지는 보론으로, 서양의 풍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이다. 혼례⸱ 음식 오락 등과 서양 대도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은 거의 전부 후쿠자와의 『서양 사정』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서유견문』에 나타난 유길준의 ‘근대화론’의 특징은 전통의 장점을 살리고 전통의 단점을 서구의 장점의 도입으로 보완하는 ‘취장보단(取長補短)’과 전통과 근대의 중용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유교의 오륜에 바탕 한 윤리 외에는 모두 변혁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동도서기론’과 구분된다.

 

 1896년 국왕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유길준이 일본에 망명함에 따라 『서유견문』 역시 출간된 지 10개월도 채 안 되어 자유롭게 유포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견문』은 시의에 합당해 쓰일만한 서적으로 인식되어 공립소학교 혹은 사립학교의 교과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신문』·『황성신문』 등에 원문 그대로 인용되거나 그 논지가 실리기도 했으며, 이승만, 안창호를 비롯한 지식인 정치가 계몽운동가들에게도 탐독됨으로써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개화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해 한국의 문자생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존의 한문 위주의 문자 생활이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 중심의 종속관계를 유지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우리 글인 한글 사용을 장려함으로써 국민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중국으로부터의 자주 자립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유견문』에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 연호를 쓰고 있다. 한글 보급을 확대하려는 그의 의지는 나중에 최초의 국어문법책인 『조선 문전(朝鮮文典)』·『대한 문전(大韓文典)』(1909)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유길준(兪吉濬)의 호는 구당(矩堂)으로 서울 양반가 출신이지만 박규수 문하에 출입하고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과거시험을 거부, 개화파로서 외국 유학을 감행하는 독특한 행로를 걸었다. 1881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잔류해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게이 오의숙에서 공부했으며, 1883년에는 보빙사(報聘使)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가 2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갑신정변 후 유럽을 거쳐 귀국했는데, 『서유견문』은 그 후 연금 상태에서 쓴 책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친일 개화화 정각으로서 친일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각종 개혁 정책을 지휘했으나 1896년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 1907년에야 귀국했다. 이후 교육과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노동야학 독본』과 『대한 문전』 등 다양한 서적을 간행하였다. 1910년 강제병합 후 일본 정부에서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부한 바 있다.

 

 『서유견문』은 근대 초기 큰 영향을 미친 서양 견문록이다. 일본 ・ 미국을 거쳐 유럽까지 두루 여행한 유길준이 그 견문을 바탕으로 하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 사정』 등 외국 서적을 참조하여 내용을 구성했다. 단순한 여행기 수준을 넘어서 세계의 지리와 형편에서부터 서양의 각종 제도 ・ 문물 ・ 풍습을 소개하고 조선의 개혁 방향을 제안하는 체계적 개혁 서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종래 지식인들의 문체인 순 한문 대신 국한 문체를 채택하고 새로운 근대 어휘와 개념을 다수 소개해 당대의 지식 ・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유견문 속표지, 초판(영인본)

 

 『서유견문』은 서문과 목차 외 총 20편 71개 항목에 달하는 본문으로 구성돼 있다.

 첫머리의 제1-2편은 ‘지구 세계의 개론’이라 하여 세계 지리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으로서, 중화 중심 옛 시각에서 벗어나 전 지구로 시야를 확장하라는 요청을 전달하고 있다.

 

 제3-8편에서는 국가 ・ 정부 및 인민의 직분과 권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며, 이후 제9-14편에서는 교육 ・ 화폐 ・ 법률 ・ 경찰 등 다양한 제도를 소개하고 학문과 종교를 개관하며 정당 시스템이며 교육체제와 직업의 갈래 등을 소개한다.

 

 제14편은 실업계를 소개하는 내용에 덧붙여 유명한 ‘개화의 등급’을 논한 부분이다. 여기서 유길준은 개화 ・ 반개화 ・ 야만으로 문명의 등급을 소개하면서도 개화를 특정 모델에 한정 짓는 대신 ‘지선 지미(至善至美)’의 사회 질서에의 지향 일반으로 설명한다.

 

 이후 제15~20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 사정』을 크게 참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경제학자 포셋(Henry Fawcett)의 『부국 책』이나 미국 법학자 휘튼(Henry Wheaton)의 『만국공법』 등의 영향도 받았다고 하나 『서양 사정』의 영향이 그중 뚜렷하다.

 

 총 71개 항목 중 26 항목이 『서양 사정』을 번역한 내용인데, 그 대부분이 제15편 이후에 집중돼 있다.

 

 여기서 다루는 내용은 실로 다양하여, 서양의 의식주와 결혼 풍속을 설명하는가 하면, 빈민원 ・ 병원 ・ 정신병원 ・ 박람회 ・ 박물관 ・ 도서관 ・ 신문 등 각종 제도와 매체를 소개하고 덧붙여 증기기관과 전신 ・ 전화 등에 특별한 관심을 할애하고 있다.

 

 책 마지막인 제19~20편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대도시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서유견문』은 1895년 일본 도쿄의 교 순사에서 출간했다. 교 순사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립한 출판사다. 1885년에서 1889년, 저자 유길준이 연금 상태에서 완성한 원고를 이때 출판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는 유길준이 갑오개혁 후 입각해 있던 당시로서,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대신 무료로 1천 부를 찍어 배포했다고 한다. 표지는 제목과 저자 ・ 출판사의 한자 표기만으로 구성한 단순한 디자인이다. 판권지에 따르면 유길준에 이어 게이 오의숙에서 수학한 후배 격인 어윤적과 윤치오가 교열을 본 것으로 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