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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권

한양도성 순성길[제1,021회 /2022.6.18(토)-37차산행*山782]

 

창의문(북소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1020.7022.7212

건너편 윤동주 문학관

▲ 최규식 경무관 동상

◉ 사건 개요 (1.21사태 또는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리고 있음)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무장공비 31명과 서울 세검정고개에서 교전하다가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최규식 총경은 당일, 정종수 순경은 1월 29일 월요일 순직.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을 창설.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서 우리 군 33명도 전사.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은 1968년 1월 13일 북한군 정찰국장 김정태(金正泰)에게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작전 지시를 받고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돌파하였다.

 

서부 전선의 미군 담당 군사지역에 잠입하여 하룻밤을 숙영(宿營), 19일 밤 8시 30분경 임진강의 얼음판을 횡단, 당시 경기도 파주군 법원리의 삼봉산(三峰山)에서 2일째 숙영을 한 다음, 20일 앵무봉을 통과하여 비봉·승가사(僧伽寺)로 이어지는 산악길을 타고 이날 밤 10시 서울시내 세검동 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렀다.

 

자하문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 “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의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으며 계속 행진하였다. 약 400여m를 더 행진했을 무렵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 병력과 첫 접전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이 먼저 자동소총을 쏘며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현장을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총경이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이송하였으나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때부터 게릴라들은 현장을 지나가는 버스 안에 수류탄 1발을 투척, 승객에게 부상을 입히는가 하면 자동소총에 실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뿔뿔이 흩어져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서대문구 홍제동 민가에서는 한 시민이 게릴라와 격투를 벌이다가 총격으로 사망하는 등 이날 밤 민간인 5명이 살해되었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일당 가운데 김신조(金新朝)를 발견, 생포하는 한편,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그날 밤 게릴라 5명을 사살한 데 이어,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1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김신조 사건 순직’ 정종수 순경 흉상 세웠다

2017년 6월 5일 기사

 

이른바 ‘김신조 사건’으로 불리는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 때 북한 무장공비를 막다가 목숨을 잃은 경찰관의 추모 흉상이 50년 만에 세워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5일 오전 서울 청운동 자하문고개 현충시설에서 고 정종수 경사(당시 순경)의 흉상 제막식을 열었다. 흉상은 한국기초조형학회 학회장인 류경원 충북대 교수가 제작했다. 흉상 전면에는 공적 요지와 함께 국가 수호를 위한 경찰의 활약을 현대적인 이미지로 표현한 부조상이 새겨졌다. 서울경찰청과 서울시 재향경우회, 서울북부보훈지청이 공동으로 주관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정 경사의 장남 정창한(61)씨 등 3남2녀를 비롯한 유족 8명이 참석했다. 김정훈 서울경찰청장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경찰관이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정 경사는 종로경찰서 수사과에서 근무하던 68년 1월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124부대원 31명을 막다가 숨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해 같은 해 2월 1계급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때 함께 순직한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은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추대되고 69년 청와대 인근에 동상도 세워졌으나 정 경사는 하위직이란 이유로 대상에서 누락됐다.

 

7시 전이라 담당자가 고개쳐들고 자고있음

우측코스가 개방전이라 신규코스(2020.11.1)로 숙정문 통과해서 진행

 

서울 한양도성 [사적 제10호]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의 경계를 표시하고 그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 5년(1396), 백악(북악산)·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양도성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이다. 이 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한양도성은 순성길을 따라 하루에 돌아볼 수 있지만,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한다.

[출처: 서울시 서울한양도성 홈피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

 

백악 구간

 

▶구간 : 창의문~혜화문

▶거리 : 4.7km

▶소요시간 : 약 3시간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백악(북악산, 342m)은 옛 서울의 주산으로 내사산 중 가장 높다. 공극산(拱極山), 면악(面岳)이라고도 하였으며 산세가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될 만큼 아름답다. 한양도성은 백악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 창의문-창의문 안내소-백악 돌고래 쉼터-백악 쉼터-백악마루-1·21 사태 소나무-청운대-암문-백악 곡성-백악 촛대바위-숙정문-말바위 안내소-우수조망명소-와룡공원-암문-서울과학고등학교-경신고등학교-혜성교회-두산빌라-혜화동 전시안내센터(옛 서울시장공관)-혜화문

 

■ 탐방시간

 

구분 겨울(4개월)
(11~2월)
봄, 가을(4개월)
(3~4월/9~10월)
여름(4개월)
(5~8월)
개방시간 09:00~17:00
(15시까지 입산)
07:00~18:00
(16시까지 입산)
07:00~19:00
(17시까지 입산)

 

■ 탐방 절차 간소화 → 신분확인 절차 생략

■ 365일 연중무휴

[출처: 서울시 서울한양도성 홈피 http://seoulcitywall.seoul.go.kr/main/index.do ]

왼쪽 전봇대에 방향 표시

북악산1번출구족으로 진행

청운대 안내소(여기두 문을 안열어서 표찰 못받음)

곡장으로

곡장 다녀와 진행

촛대바위

삼청각

여기도 닫혀있네

지금부턴 와룡공원 방향으로

‘삼청각’ 권력자 요정에서 시민 마당으로 …

서울시 전통문화공간으로 새 단장 … 공연·문화 체험장 10월29일부터 손님맞이

한때 보통 사람은 감히 얼씬할 생각도 못했던 삼청각(三淸閣)의 대문이 활짝 열린다. 대원각, 선운각과 함께 ‘밀실정치’ ‘요정정치’의 무대로만 기억되던 삼청각이 지난 10월29일 전통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것. 10월29일~11월11일까지 14일 동안 삼청각에서는 일화당과 야외전통놀이마당의 개관 축제공연을 보고 전통차 한잔 마시며 북악산 자락을 내려다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일부 권력자들의 음풍농월 장소였던 이곳이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한번쯤 찾아가 신선 놀음을 해볼 만도 하다.

서울 성북구 성북2동에 자리잡은 삼청각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조절위원회 대표단의 만찬이 베풀어진 장소로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와대 옆 삼청공원을 오른쪽으로 내려다보며 북악산을 오르면 삼청터널을 지나 100m도 못 가서 왼편으로 삼청각의 팻말이 보인다.

삼청각은 그동안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는 부침을 겪었고 한때 고급빌라 건설이 추진돼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지난해 서울시가 이곳을 인수, 전통문화공간을 조성하기로 결정하면서 보존이 확정되었다. 5개월여의 리모델링 작업 끝에 개관을 앞둔 삼청각을 찾았다.

20여 년간 은밀한 사교장 명성

한창 단풍이 들어가는 북악산을 배경삼아 지상2층, 지하2층으로 넉넉하게 자리잡은 일화당(하나가 되는 집)과 담 혹은 나무 뒤에 숨어 언뜻 그 자태가 드러나지 않는 부속 건물 유하정(그윽한 노을이 깃드는 정자), 취한당(비췻빛의 서늘한 정자), 동백헌(동녘에 밝은 집), 천추당(영원한 깊은 가을의 정자),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찾았다는 청천당(봄의 물소리가 들리는 정자)이 보인다. 서울 중심지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이처럼 고즈넉한 장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72년 신선이 놀던 1만3400㎡의 땅에 본관(일화당)과 별관 4개 동으로 이루어진 삼청각이 세워지면서 소문도 많았다. 건물 소유주는 민간인이지만 실제 토지매입과 설계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했다는 것과, 남북회담 대표자 만찬을 위해 단 3개월 만에 급조했다는 내용 등이다.

삼청각의 최초 설계자인 정재원씨(68·현재 라이온건축 대표)는 “이미 72년 2월 기초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해 4월 설계에 들어갔다. 6월에는 부속건물 공사를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정씨 말대로라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훨씬 전부터 이 연회장의 건축을 준비해 왔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도보나 자전거로 통행할 수 없고, 주정차가 금지될 정도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 이 지역에서 밤낮없이 공사를 하려면 중앙정보부의 지원은 필수였다. “공사기간이 너무 짧아 하청업체 어느 한 곳이라도 지연되면 큰일이었다. 그때마다 직접 중정이 나서서 이들을 독려했다. 야간작업도 강행했는데 통행금지 때는 그쪽에서 내준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정씨는 당시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측도 삼청각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 자그마한 결함이라도 발견되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고 고위 관리자가 자주 현장에 들렀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삼청각 본관 일화당은 기단은 궁전 양식, 건물은 민가 양식, 담과 대문은 고궁 양식을 택해 우람하면서도 고전적인 자태를 잃지 않는 전통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 후 삼청각은 20여 년간 정·재계 인사들의 은밀한 사교장소로 사랑받았고 외국 바이어가 오면 그들을 모시는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심심치 않게 각 정당과 전경련 모임 등 굵직한 행사를 치렀으나 일본 관광객 상대의 기생파티로 위상이 급격히 추락해 결국 93년 매각되고 말았다. 94년 ‘예향’이라는 이름의 전통혼례식장 겸 음식점으로 바뀌어 옛 명성을 회복하려 했으나 역시 경영난으로 건설회사에 팔려 고급빌라 건설이 추진되었다.

서울시는 삼청각의 보존을 결정한 후 이름을 놓고 잠시 고심했다. 일각에서 고급요정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문화예술계 인사들 대부분이 원래 ‘삼청’(三淸)의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는 쪽으로 입을 모았다. 삼청은 원래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집을 의미하는 태청(太淸)·옥청(玉淸)·상청(上淸)을 아우르는 말이라고 한다. 주공연장이 될 대연회장 일화당(一堂)도 “풍류로 어우러져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니 돌이켜보면 남북 대표들의 만찬장 장소로 이만한 이름도 없었다.

서울의 새 명소로 자리잡을 듯

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삼청각은 세종문화회관이 운영을 맡았다. 김승업 삼청각 운영부장은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극장처럼 한국의 전통극을 상시 상연하는 레퍼토리 시어터 형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본관인 일화당은 수납식 객석을 꾸며 일반 무대형태인 프로세니엄, 마당놀이 형식의 아레나, 패션쇼 무대인 개방형, 연회장 등 필요에 따라 어느 쪽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청천당과 천추당은 주로 외국인 관광객 혹은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위해 다례, 규방공예, 도자기 공예 등을 배우는 한국전통문화 체험공간으로 꾸며지고 삼청각 북서쪽 나무숲에 가려진 팔각정 모양의 유하정에서는 민요, 가야금, 대금 등 전통 소리강좌가 열린다. 41평 규모의 취한당과 42평의 동백헌은 전통 온돌식 방과 툇마루, 뒤뜰 등 전통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전통 객관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부대시설로 프라자호텔측이 직영하는 한식당(아사달)과 전통찻집(청다원)이 일화당 1층에 자리잡았다. 특히 청다원의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일품이다. 우선 조선 태조 4년에 축조했다는 18km 길이의 서울성곽이 삼청각 터를 크게 감싸고 돌고 거기에 수령 100년이 넘는 적송 350그루가 버티고 있다.

삼청각 보존을 주장해 온 건축가 김영섭씨는 이곳이 서울 ‘북촌 문화벨트’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삼청각 맞은편은 와룡공원과 서울성곽을 지나 계동·가회동 등 한옥마을, 팔판동·소격동의 화랑가, 인사동까지 이어진다. 또 성북동의 만해 한용운 생가인 심우장과 성낙원, 이재준가 등 서울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건물들을 이어주는 고리 구실도 한다.

서울프라자호텔, 교보문고, 경복궁에서 삼청각까지 오르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주차장이 협소하기 때문에 승용차는 세종로와 프라자호텔 주차장에 두고(4시간까지 1000원) 셔틀버스를 타고 가는 게 좋다.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혜화문 여기도 닫혀있다(좌측으로 진행 도로나오면 우측으로 횡단보도 건너 녹색계단으로 진행)

우측으로 가면 여기나옴 여기도 닫힘(전화로 해서 안내받음)

우측으로

이화마을 방향

1번 출구에서 친구들 만나 다시 난산공원~이하벽화마을~동승동 대학로

이승만 이화장(공사중이라 no개방)

개그맨 이원승이 하는 피자집